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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은 의지와 신념 잊지 못합니다'…DJ 회고하는 김진덕 전 미주 호남향우회 회장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몸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 분이 남기신 불굴의 의지와 신념, 특히 평화적 남북통일에 대한 정열은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접한 김진덕(사진) 전 미주 호남향우회 회장의 슬픔은 남다르다. 스스로를 ‘김대중 신봉자’라고 표현하는 김 전회장은 미주지역 측근의 한 사람으로써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왔었다. 김 전회장은 70년대초부터 김 전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한국 감사원에 재직하던 김 전회장은 DJ가 강연이나 연설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민주주의를 향한 사자후’를 들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정보기관으로부터 미움을 사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고 전했다. 1976년 김 전회장이 도미한 후에도 친분은 이어졌다. 특히 미주 호남향우회 총연합회 회장이던 1991년부터 1995년까지는 DJ의 미국 일정에 항상 동행하며 뒷바라지를 해주기도 했다.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는 이희호 여사와 3남 홍걸씨가 베이지역에 올때면 김 전회장 자택에서 머물다 가곤 했었다. 지난 1998년 DJ가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 SF를 공식 방문했을때는 김 전회장의 장남 한일(치과의)씨가 IMF 위기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써달라며 DJ에게 3만달러를 전달, 한국의 IMF 극복을 위한 해외 동포들의 지원 열기에 불을 당기기도 했다. 김 전회장은 “지역주의 정치, 햇볕정책 논란 등 김 전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정치인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당대가 아닌 후대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이고 남북간 협력과 화해의 물꼬를 튼 점 등 민족을 위한 수많은 업적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광민 기자 kwang@koreadaily.com

2009-08-20

[윌셔 플레이스] 김 전 대통령의 평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통령 가운데 최악의 지도자는 누구일까.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인해 쫓겨나다시피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던 리처드 닉슨. 당시 그의 지지율은 24%에 불과했다. 닉슨보다 더 못한 대통령도 있다. 해리 트루먼의 경우는 고작 22%. 트루먼은 한국전쟁을 제대로 마무리 못해 우리에게도 비호감으로 느껴지는 인물이다. 맥아더 보직 해임이 그의 지지율을 끌어내리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것. 심지어 탄핵 여론이 거세게 일어나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백악관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학자들의 시각은 다르다. 올해 초 정치전문 케이블 채널인 C-SPAN이 교수들을 상대로 한 대통령 평가 순위 조사에서 믿기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트루먼이 조지 부시를 포함한 역대 대통령 43명 중 5위로 랭크된 것. 1.2위는 에이브러햄 링컨과 조지 워싱턴 3.4위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시어도어 루스벨트. 바로 다음이 트루먼이었다. '세기의 국장'으로 거창한 장례식을 치른 로널드 레이건은 10위로 턱걸이했다. C-SPAN 조사에서 뿐이 아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을 포함한 각종 조사에서도 트루먼은 상위에 올라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위대한' 대통령이었던 것. 꼴찌의 반란도 이런 경우는 드물 것이다. 대통령은 당대의 사람들이 아닌 후대의 역사가 평가해야 한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나온 김에 트루먼 얘기를 더 해 보자. 가난한 농삿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최종학력이 고등학교 졸업. 정계입문도 계보를 통해서다. 어느 보스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이른바 '거수기'(the machine) 노릇을 하며 정치의 밑바닥을 배운 것. 보스의 공천을 받아 카운티 선출직 공무원에 당선된 트루먼은 이후 자력으로 정치의 지평을 넓혀 끝내 최고 통치자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런 트루먼이 정치인을 혐오하고 경멸했다는 사실은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계보정치의 폐해를 속속들이 알고 있어 이런 의식을 갖게 된 모양이다. 트루먼은 정치인을 '폴리티션'(politician)과 '스테이츠맨'(statesman)의 두 부류로 나눴다. 전자는 정치(政治) 모사꾼 후자는 옳을 正을 써 '정치가'(正治家)라고 번역해야 원래의 뜻에 가깝다. 폴리티션은 넘쳐나는데 올바른 식견을 가진 스테이츠맨은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정치판. 트루먼은 이를 개탄한 것이다. 그가 남긴 말은 정치학 교과서에도 실려 후대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폴리티션이 스테이츠맨이 되려면 최소한 15년은 죽어 있어야 한다." 오랫동안 몸에 밴 야합과 독선 권력에 대한 집착 따위를 떨쳐내야 비로소 참 정치인이 될 있다는 의미다. 퇴임 후 미주리주의 고향 마을로 되돌아 온 트루먼은 후임자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은퇴노인들의 건강보험인 메디케어는 린든 존슨 대통령 때 시행됐지만 당초 트루먼이 추진했던 정책. 존슨은 트루먼 부부 앞에서 이 법안에 서명하며 직접 보험카드를 건넸다. 폴리티션으로 시작했을지언정 스테이츠맨으로 끝을 맺은 트루먼의 정치일생. 그의 재임시 치적이 나중에 재평가를 받아 꼴찌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다. 엊그제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도 퇴임 시 지지율은 20% 안팎이었다. 그는 과연 어떤 대통령이었을까. 한민족 통합의 주춧돌을 세운 스테이츠맨일까 아니면 계보.지역정치의 끈을 놓치못한 폴리티션일까. 좌.우의 시각에 따라 서로 엇갈린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판단은 훗날 역사의 몫이다.

2009-08-19

[특별 기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사모하며

1924년 이 땅에 오셨다가 2009년 85세로 생을 마치셨다는 밤 늦은 시간에 들려온 비보에 비통함으로 잠을 이룰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조국의 민주화와 인권문제를 위해 투쟁하시다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당하시면서도 정의를 위해 매진하셨습니다. 또한 통일 운동에 평생을 헌신해 독재종식과 민주주의의 정착 한반도 평화조성에 크게 이바지 하셨다는 평가를 받고 그 공로로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셨습니다. 후광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이셨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신지 1개월 이상 사선을 넘나드시다가 끝끝내 회복을 못하시고 돌아가시다니 너무나 안타깝고 슬픔니다. 선생님은 1961년 58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신후 6대(63년) 7대(67년) 8대(71년)13대(88년) 14대(92년)국회의원으로 원내활동을 하셨습니다. 71년 신민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시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석패하신후 87년 92년 거듭 낙선되시었습니다. 97년 마침내 한나랑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셨습니다. 72년 유신체제 등장 후 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혀 투옥과 연금 해외 망명생활을 하는 등 숱한 고초를 당하시다가 인동초처럼 피어나셨습니다. 73년에는 일본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 납치되어 수장을 당할 뻔 하셨고 유신 이래 5년반의 투옥 3년여의 망명 6년반의 가택연금으로 신체의 자유마저 누릴 수 없었던 선생님은 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의 비상계엄령 확대 조치 때 학생소요사태의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되신 후 광주 민주화 운동을 사전 지시하셨다는 내란음모혐의로 80년 7월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신 선생님은 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여 미국으로 오셨습니다. 83년 한미 인권문제 연구소를 창설하셨고 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 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 민주화 항쟁을 이끄셨습니다. 1987년 11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햐셨으나 노태우 대통령에게 고배를 마시셨습니다. 그후 92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에게 패하시고 95년에 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97년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야권공조를 앞세워 97년에 건국 이후 3전 4기 끝에 드디어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하셨습니다. 특히 대통령 재임기간 6.25 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었던 외환위기(IMF)를 극복하시고 2000년 6월 15일에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하시고 남북화해 협력시대를 여셨습니다. 선생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대북 햇볕정책을 둘러싼 보수층과의 갈등으로 대통령 임기내내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퇴임 후에도 대북비밀송금과 현실정치개입으로 정치권과 마찰을 빚기도 하셨습니다. 남북간에 경색된 분위기가 조금 풀릴듯 보이는 요즘 이제부터 대통령님의 크신 역할을 기대하던 이 시점에 영면의 소식을 듣고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진정키 어렵습니다. 허나 하늘나라에 가셔서도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평화통일을 이룩하는데 크게 도와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이곳에 남은 우리들 선생님의 뜻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편히 쉬십시오. 이곳에 남겨놓으신 대통령님의 업적은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의 역사 속에서 길이 길이 빛날 것입니다.

2009-08-19

[사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

한국정부가 지난 18일 서거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기로 한 것은 합당한 결정이다. 김 전 대통령이 생전에 이룬 업적들을 감안하면 '전직 대통령의 첫 국장'이라는 타이틀이 결코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 남북관계 개선의 상징적 인물이다. 모두가 침묵을 강요당했던 군사정권에 맞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고 대결과 극복의 대상으로만 인식됐던 북한을 화해와 협력이 가능한 상대로 전환시켰다.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더 큰 역할을 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 전 대통령은 미주 한인사회와도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지난 1982년 부터 3년간의 미국 망명생활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한인들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이 무렵 그가 설립했던 '인권문제연구소 '는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체험은 이후 해외동포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으로 이어졌다. 92년 LA폭동으로 어려움을 겪는 한인들을 찾아 위로했고 제15대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재외동포특례법'을 만들었다. 해외동포들에게 한국 내에서의 법적 경제적 지위를 보장하는 재외동포특례법은 이후 참정권으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됐다. 한인사회가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통해 하고 큰 상실감을 느끼는 이유다. 김 전 대통령이 더욱 크게 보이는 것은 그의 삶을 관통한 화해와 포용의 정신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누구보다 많은 탄압을 받았지만 앙갚음 대신 협력의 손을 내밀었다. 인내심만으로는 암살위기-망명-사형선고로 이어지는 엄청난 시련을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LA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의 분향소에도 많은 발길들이 이어지고 있다. 단순한 조문에 그치지 말고 한인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화해와 협력 구조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009-08-19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타운에도 하루 수백명 추모 발길

LA한인타운에서도 지난 18일(한국시간)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LA총영사관과 LA한인회관 두곳에 마련된 타운 분향소에는 19일 하루동안 300명에 가까운 조문객들이 다녀갔다. 지난 5월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는 젊은층이 많이 찾은 반면 김 전 대통령의 분향소에는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분향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총영사관 2층에 마련된 LA총영사관 분향소에는 이날 김재수 총영사를 비롯 LA한인회 스칼렛 엄 회장 LA한인상의 명원식 회장 LA민주평통 임원단 등이 찾아 조의를 표했다. 김재수 총영사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며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의 상징인 김 전 대통령의 죽음은 국가적 손실"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스칼렛 엄 회장 역시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김 전 대통령에게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 이날 분향소를 찾은 김순복(89) 할머니는 "김 전 대통령이 80년대 망명 시절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노인들이 더 활달하게 일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용기를 줬던 기억이 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총영사관 분향소는 22일(토요일)까지 오전 9시~오후 5시 사이 조문객을 맞는다. LA한인회 한미인권연구소 민화협 내일을 여는 사람들(구 노사모) 등 한인단체들이 모여 결성된 '대한민국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범동포 남가주 추모위원회'가 마련한 LA한인회관 대회의실 분향소에도 많은 한인들이 찾았다. 김영기 한미인권연구소 전 회장은 "김 전 대통령이 돌아가셔서 마음이 착잡하며 아쉬울 뿐"이라며 "김 전 대통령은 헌신적인 노력으로 한국에 민주화를 꽃피우신 분"이라고 전했다. 한인회관에 마련된 분향소는 21일까지는 오전 11시~오후 11시까지 22일(토요일)에는 오후 2시까지 운영된다. 한편 추모위원회는 22일 오후 5시~오후 8시까지 임마누엘 장로교회(3300 Wilshire Blvd.LA)에서 '김대중 대통령 범동포 남가주 추모식'을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박상준 집행위원장은 "함께 추모식을 하고 각자 흩어져 한국에서 열리는 영결식을 볼 수 있도록 한국 장례 일정에 맞춰 추모식 일정을 잡았다"고 밝혔다. 서기원 기자 kiwons@koreadaily.com

2009-08-19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북한 조문단 '1박2일' 머문다

북한은 20일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포함된 6명의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단 명단을 남측에 통보했다. 북측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이날 김대중 평화재단 측에 김 비서와 김 부장 등 조문 사절 6명의 명단을 통보해왔다고 대북 소식통이 밝혔다. 이에 따라 김대중 평화재단 측은 이날 오전 중 통일부에 이들의 남한 방문 신청서를 정식으로 제출할 예정이라고 소식통은 전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기남 당 비서를 단장으로한 '특사 조문단'이 "국방위원회 위원장 김정일 동지의 위임에 따라" 21일부터 1박2일간 서울을 방문한다고 이날 보도했다. 김기남 비서 외에 북한의 대남 실세인 김양건 부장이 조문단에 포함됨에 따라 우리 정부 고위 당국자와의 회동 가능성이 주목된다. 김기남 비서는 김정일 위원장의 최근 공식활동에 대부분 수행하는 최측근으로 선전선동과 역사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05년 8.15 민족대축전 참가차 서울을 방문한 길에 국립현충원을 참배하는 파격을 연출했으며 당시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 폐렴증세로 입원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 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조문단에는 2002년 10월 경제시찰단으로 남쪽을 다녀가기도 했던 김정일 위원장의 매제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도 합류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북측 조문단은 21일 오후 특별기 편으로 서해 직항로를 통해 방남한 뒤 다음날 오후 귀환할 예정이다. 중국 지도자들도 조전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에 이어 장쩌민 전 국가주석과 탕자쉬안 전 국무위원 등 중국 지도자들이 잇따라 조전을 보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애도를 표시했다. 20일 주중 한국대사관에 따르면 장쩌민 전 주석은 주한 중국대사관을 통해 19일 이희호 여사 앞으로 조전을 보내 깊은 애도의 뜻을 전했다. 장 전 주석은 "김 전 대통령은 나의 오랜 친구로서 우리는 임기 중에 21세기를 지향하는 한중 협력 동반자 관계를 수립했다"며 "중국 인민은 김 전 대통령이 한중 관계 발전에 기여한 공헌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 전 주석은 "불행한 서거 소식을 접하고 매우 놀랐다"면서 심심한 애도와 함께 이희호 여사에게 진심어린 위로를 전했다. 탕자쉬안 전 국무위원도 조전에서 "김 전 대통령은 오랜 친구로서 여러번 만남을 가졌고 올해 5월 방중시 한중 관계와 공통 관심 사항에 대해 심도있는 의견을 교환했다"면서 "생전의 모습과 한중우호 관계 발전에 대한 열정과 지혜는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고 회고했다.

2009-08-19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국장 결정 되기까지, 한때 형평성 제기···MB가 결단

정부가 19일 관례를 깨고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를 최고 예우인 국장으로 엄수하기로 결정했다. 이 같은 결정에는 지난 50년간 한국 정치의 거목으로서 그가 이룩한 업적과 성과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한평생 민주주의와 민족화해협력 인권에 헌신한 김 전 대통령의 영면에 대한 국민적 애도 분위기를 담기에 국민장이라는 형식은 너무 작은 '그릇'이라는 지적을 감안한 조치로 볼 수 있다.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날 국무회의 직후 브리핑에서 "유가족의 뜻을 존중하고 고인의 생전 업적을 기리며 이를 통한 사회통합의 대승적 의의를 위해서 국장을 추진키로 의결했다"고 설명했다. 정치권도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선 '정치 거목'의 국장 결정을 "합당한 결정"(한나라당) "당연한 결정"(민주당) "(마땅한) 도리"(민주노동당)라며 이견없이 수용했다. 정부는 애초 관례와 형평성에 따라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거행할 방침이었다. 특히 청와대와 정부는 이날 저녁 8시 임시 국무회의가 열리기 직전까지도 국장 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정길 대통령실장과 맹형규 정무수석 이동관 대변인 등 수석 비서관들도 수차례 숙의를 거듭하는 등 진통을 겪었다. 원칙과 관례 차후 전직 대통령 장례에 미칠 파장을 고려해 국민장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으나 호남의 민심과 향후 대야관계 원활한 국정운영 등을 감안해 국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논란과 진통은 이명박 대통령이 '대승적 차원'에서 국장을 엄수키로 결단을 내리면서 신속하게 정리됐다는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여러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고 (국민장으로) 그대로 가야한다는 말도 많았지만 이 대통령이 결단을 하면서 일거에 정리됐다"고 말했다.

2009-08-19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전직 대통령 첫 국장···화합 이끈다

국장으로 치뤄질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 방식과 절차에 관심이 쏠린다. 국장은 국민장과 함께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부가 공식 주관하는 장례 의식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현직에 있다가 서거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적용된 이래 이번이 처음이다. 퇴임 이후 서거한 최규하.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됐고 이승만.윤보선 전 대통령은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김 전 대통령의 장의 형식이 국장으로 결정됨에 따라 앞으로 한승수 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장의위원회가 구성되고 장의위원장 명의로 일간신문에 장의가 공고된다. 정부는 또 김 전 대통령의 국장을 주관할 장의위원회를 통해 구체적인 장의 집행계획을 세우게 된다. 전례를 보면 장의위원회는 위원장과 함께 고문 부위원장 위원 집행위원 실무위원회 등으로 구성된다. 통상 고문은 3부 요인과 정당대표 친지 기타 저명인사가 부위원장은 국회부의장과 감사원장 등이 맡고 위원은 3부의 장관급 이상과 국가유공자단체 사회 종교 경제 교육 금융 언론 등 사회단체 대표 등으로 이뤄졌다. 노 전 대통령의 장의위원회는 노 전 대통령 측 인사가 참여하면서 사상 최대인 1383명으로 구성됐다. 정부는 또 장의위원회 구성에 이어 집행.운영위원회와 관련부처 실.국장들이 참여하는 실무작업단을 통해 영결식장 준비와 초청인사 결정 운구 차량 선정 장의행렬 순서 편성 등 장례의 세부 절차와 계획을 수립한다. 김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23일 국회의사당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과 전직 대통령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다. 영결식은 군악대의 조악 연주를 시작으로 국민의례와 고인에 대한 묵념 고인 약력 보고 조사 종교의식 주요 인사 헌화 조가 조총 발사 등 순으로 진행된다. 노 전 대통령의 경우 경복궁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뒤 서울광장에서 노제를 열고 서울역까지 운구행사를 한 바 있어 이번 영결식에서도 노제와 운구 행사가 검토될 것으로 보인다. 안장식은 장지가 서울현충원으로 결정됨으로써 국가보훈처에서 준비하게 된다. 장의 기간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액 국고로 지원하게 되는데 노 전 대통령 장례 때에는 약 30억원이 지원된 바 있다.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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